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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의 사람들에게는 피크닉이 아주 일상이라는 걸 종종 느낀다.
어제는 그저께 상태가 좋지 않음을 느꼈기 때문에 밖에 나가지 않으려고 했으나 저녁 쯤 되니까 좀이 쑤시고 너무 리젠트파크에 가보고 싶어졌다. 나갈때 마다 한시간 넘게씩 들여서 화장하고 옷을 입는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터라 화장하지 말고 나가보자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고 (최근 나의 거의 제일 큰 화두이다) 그래서 저녁을 잘 챙겨먹고(뿌듯- 비록 레토르트 식품의 향연이었긴 하지만. 오늘 한인마트 갈거니까!) 세수하고 이 닦은 후에 선크림만 발랐다. 더워서 머리를 묶는게 나을 것 같아 정말 오랜만에 머리를 위로 묶고 거울 속의 나를 체크한 후에 집을 나섰다. 사실, 화장을 안했다고 해서 준비과정이 이렇게 한문장으로 끝날 만큼 또 짧았던 건 아니다.. 선글라스를 썼다가 이마에 걸쳤다가 여러 모습들을 체크하고 볼의 홍조가 얼마나 심한지도 몇번씩 다시보고. 어느정도 나의 모습을 파악하고 또 좀 만족스러워진 후에야 집을 나설 수 있었는데 이게 과연 '화장 안 하고 외출하는 것'의 의의를 가지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의미 있는 과정의 한 부분이라고는 생각한다. 나가서도 한번씩 내 모습을 체크하고 너무 추리한가? 생각도 들었다. 안하면 더 좋을 생각과 행동임은 분명하지만 당장 그 모든 생각과 행동을 멈추려고 스스로를 내몰지는 않으려 한다 그게 더 스트레스니까. 빈에서도 처음에는 늘 완전히 준비된 상태에서 나가다가 후에는 세상에서 제일 대충 입고 나갈 때도 많았던 것처럼 탈코의 맥락 뿐 아니라 도시에 대한 적응의 맥락도 있다고 생각하고.
어쨌든. 그렇게 집을 나섰다.
이건 낮의? 사실 8시까진 하루종일 이 모습이라 몇시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낮의 내 방 창밖 풍경이다. 저 나무를 참 좋아한다. 어제도 썼던 것 같은데, 예쁘다 반질거리는 잎들이.
최종 목적지는 프림로즈힐이었는데 리젠트파크를 목적지로 찍어서 한 삼십분 걷게 되었다. 근데 그게 전혀 문제는 아니었고, 리젠트 파크도 늘 궁금했으니까. 저녁에 나온 건 잘한 선택이었다.. 더운거 싫고 사람 많은 거 별로 안좋아하는 나에게는 여름 런던에서는 8시 이후가 맞는 시간대인 것 같다.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이 8시가 넘어서도 런던은 여전히 너무나 환하고, 햇살 아래는 따땃해서 혹은 더워서 사람들이 선글라스를 끼고 와인을 병째 들이키며 혹은 책을 읽거나 깔깔거리고 춤을 추면서 대낮인것 마냥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실 이 정도로 밝고 환한데, 시계만이 숫자 8을 가리키고 있는 게 저녁-밤으로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유럽의 여름은 그래서 신기하다. 어쨌든. 아직 해질녘까지는 멀었다는 걸 알기 때문에 프림로즈힐 가는 중간에 그늘진 벤치에 앉아 책을 잠시 읽으며 조금 아파오던 머리를 식혔는데, 바람이 어찌나 불던지 처음에는 살랑살랑 기분 좋았는데 좀 지나니까 쌀쌀해져서 가디건을 입고 잠시 머무르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한국이랑 너무 다른 점은 도시 한복판에 엄청난 녹지가 조성되어있다는 건데, 단순히 나무가 많고 산책로가 많을 뿐 아니라 한국에서는 완전한 교외도시 바베큐장이나 골프장에서만 볼 수 있는 아주아주 넓은 잔디밭이 공원 곳곳에 있다는 것이다. 정말 말그대로 양지바른 곳이어서 햇빛이 쫙 내리 깔린 그곳에서 사람들은 8시가 넘었는데도 누워서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그 넓은 잔디밭을 봤을 때 - 뭔가 잔디밭이라기 보다는 평원에 가까운 느낌이 들 정도-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프림로즈힐로 걷는 중에 나무 사이로 내리쬐는 해질녘의 햇살이 예뻐서. 그렇게 프림로즈힐에 가까워졌고 드디어 내가 아는, 지그재그의 좁은 길에 가로등이 띄엄띄엄 서있고, 그 뒤로 언덕이 보이는 공원에 다다랐다. 정말 놀랐던 것은 사람이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많다는 점이었다. 프림로즈힐이 있는 공원은 리젠트의 다른 곳들보다 훨씬 사람이 많았고 연령대도 낮았다.(약간 청년들의 핫스팟 그런 느낌..?) 겨울의 프림로즈힐은, 야경을 보려는 관광객들 몇몇과 추위를 이겨내고 굳이 그곳에 앉아서 대마를 하거나 감상에 젖은 런더너 몇이 다였는데 어제는 정말.. 장관이었다. 하긴 날씨가 그렇게 좋고, 런던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곳에 사람들이 모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래도 언덕 올라가면서 나에게는 까만 실루엣으로만 보여 인종도 성별도 나이도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약간 위압감을 느끼기도 했다. 언덕 위에 많은 사람들이 서 있기도 했지만 언덕을 올라가는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돗자리를 깔고 와인 병나발을 불고 앉아서 이야기를 하거나 연인들끼리는 뒤엉켜있어서 이것 또한 런던의 또 다른 장관이라는 생각을.
여름의 프림로즈힐은, 가로등이 하나둘 켜질 때까지 꽤 오랜시간을 기다려야하지만 그럼에도 그 만의 정취가 있었다. 추위에 오들오들 떨지 않아도 되고, 그저 앉아서 노래를 듣고 무언가를 마실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올라가는 길에 아주 쓸쓸하게 앉아서 혼자 노래를 들으며 멀리 런던 중심부를 바라보는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여자 한 명을 보았는데 왠지 지난 학기 홀로 여행다니던 내 모습 같아서.. 동질감을 조금 느꼈다는 이야기.. 그러나 대부분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앉아있었고 혼자인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언덕 맨 위까지 올라가서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좀 앉았다 가야겠다는 판단에 언덕을 조금 내려와서 주위 사람들과 공간적 여유가 있는 곳에 철푸덕 앉았다. 책을 좀 읽으려고 했는데 이 아름다운 풍경을 두고 눈이 도저히 액정으로 가질 않아서 5초 만에 포기하고 물 한모금 들이킨 후에 계속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 구경도 했다. 사진 한가운데 보이는 커플은 후에는 키스를 엄청 열심히 했는데(약간 걱정될 정도로) 그래서 기억에 남아있다.
여행 다닐 때도 늘 그랬지만 내가 어딘가에 홀로 앉아서 인생의 고민을 하거나 그러는 건 전혀 아니다. 나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아무 생각 안하는 때가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냥 사람들 보면서 ㅋㅋ 귀엽네 헉 신기하네 이런 정도? 한참 앉아 있다보니 어느새 가로등 불빛이 탁 켜졌다. 겨울의 프림로즈힐에서는, 그 가로등 불빛들이 어둠 속에 가로등의 기둥은 드러나지 않은 채로 지그재그 길을 따라 떠 있는 모양새여서 마치 별 같았는데. 여름에 그런 모습을 보려면 열시반까지는 기다려야할 것이고 나는 한시간쯤? 사십분쯤 후에는 너무 추워져서 몸을 몇번 슥슥 쓸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버스타러 가는 길.
앞서 말했던, 별 같은 가로등들. 난 딱 이 시간대를 참 좋아한다. 여름에는 늦게까지 기다려야 볼 수 있다는 게 좀 아쉽긴 하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요즘 또 다시 생각하고 있는데 한 때 관심이 컸던 미학 예술 다 그냥 취미에 머무르는 게 좋을 것 같아 생각도 든다. 소위 인생노잼시기인 걸까 여러가지를 직업 삼는 상상해보는데 다 별로 재미없을 것 같다. 가끔 이럴 때 있긴 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데 아.. 뭐해야하지 생각 드는 요 며칠.
미루고 있는 해야하는 일들이 있다 - 린지, 나스탸 편지 답장이나 인턴 찾아보기 같은. 오늘은 꼭해야겠다 내일부턴 수업 시작하니까 자의 아니라도 조금은 정신 없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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